술마시고 서서 보며 출연자 되는 공연, 한국에서 통할까

지난달 개막 ‘위대한 개츠비’로 본 이머시브 공연의 성공 가능성

2015년 영국에서 첫 공연된 ‘위대한 개츠비’가 한국에 들어왔다. 다음 달까지 공연된다. [사진 마스트엔터테인먼트]

10일 오후 서울 을지로 그레벵 뮤지엄 2층의 ‘개츠비 맨션’. 피아노가 놓인 작은 무대, 그 옆엔 샴페인과 칵테일 바가 차려져 있었다. 이날 관객 100여명은 아무 데나 서서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술을 마셨다. 소란스러운 와중에 뮤지컬 배우 마현진이 관객처럼 입장해 무대 곁에 코트를 벗어두고 무리에 섞였다. 첫 대사는 청중 사이에서 나온다. “제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제야 조명이 배우를 비춘다. 마현진 배우는 F. 스콧 피츠제럴드의 1925년 소설 ‘위대한 개츠비’ 중 닉 캐러웨이다. 특별히 정해진 무대가 없고, 관객이 극에 참여하는 이머시브(immersive, 몰입형ㆍ실감형) 공연 ‘위대한 개츠비’는 이렇게 시작한다.

관객은 개츠비의 호화로운 집에서 열린 파티에 참석하고 있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술잔을 들고 관객들 옆에 서서 대화를 주고 받고, 춤을 가르쳐주기도 한다. 이윽고 제이 개츠비가 나타나 닉과 대화를 나누면 청중은 다시 그들에 주목한다. 대화 중 개츠비가 “잠시 전화를 받고 올 동안 기다려주시죠”하고 자리를 옮기면 청중 중 일부는 우르르 그를 따라 서재로 이동한다. 여기에서 관객은 개츠비와 그의 영원한 사랑 데이지의 이야기를 훔쳐 듣듯 알게 된다. 나머지 관객은 또 다른 배우들과 함께 모두 다섯 군데의 방으로 들어간다. 공연은 서로 다른 공간에서 각각의 시점으로 흘러간다. 중요한 줄거리가 있을 때만 모든 관객이 한 군데에 모인다.

관객이 극에 개입하는 이머시브 공연은 2000년대 초반 뉴욕ㆍ런던에서 시작됐다. 대표적으로 히트한 공연은 ‘슬립 노 모어(Sleep no more)’. 셰익스피어 ‘맥베스’의 내용이 뉴욕 한 호텔에서 펼쳐지고, 관객은 100개 넘는 객실을 각자 알아서 돌아다닌다. 가면을 쓴 관객이 배우와 즉석에서 대사를 주고받는 식으로 극에 참여한다. 영국 극단이 뉴욕에서 호응을 받고 2016년 상하이에 진출해 아직도 공연 중이다. 해외에서는 이머시브 공연을 전문으로 하는 극단과 공연장이 생겨났다.

관객이 개츠비 파티 참석자가 돼 개츠비 저택의 여러 개 방을 돌아다닌다는 컨셉의 ‘위대한 개츠비’. [사진 마스트엔터테인먼트]

국내에서 이머시브 공연의 시도는 2010년대에 시작돼 2~3년 전이 절정을 이뤘다. 대학로를 중심으로 실험적 시도들이 있었고 2018년엔 네 종류 극본을 관객이 선택해서 골라 보는 공연도 나왔다. 지난달 개막한 ‘위대한 개츠비’는 먼저 시작된 서구의 ‘이머시브 공식’을 한국에 대입해보는 실험이다. 2015년 영국 요크에서 처음 공연됐고 2017년 런던 이후 아일랜드ㆍ벨기에를 거쳐 한국에 왔다.

‘위대한 개츠비’를 제작한 영국의 하츠혼-후크 엔터프라이즈는 전통적 뮤지컬을 만들다 이머시브 공연으로 중심축을 옮기고 있는 회사다. 런던에 이머시브 전용 극장을 열었고 ‘이머시브 닥터후’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크리스마스 캐럴’ 등을 잇따라 제작하고 있다. 가장 최신작인 ‘크리스마스 캐럴’은 스크루지 영감과 함께 식사하면서 극이 흘러가는, 다이닝과 공연의 결합 형태다.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은 이머시브 공연이 국내 정착 여부를 가늠할 척도가 된다. 10일 관객 중 10여명은 원작의 배경인 1920년대 스타일로 의상과 머리를 꾸미고 왔다. 제작사인 마스트엔터테인먼트 측은 “공연 개막 당시에는 맞춰서 입고 온 관객이 전혀 없었는데 이제 10% 정도는 컨셉에 맞춰 배우들과 비슷하게 스타일링 한다”고 했다. 관객이 등장인물이 된다는 이머시브 공연의 개념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번 공연에 참여한 배우들은 이머시브 공연에 적응할 수 있는 워크샵을 거쳤다. [마스트엔터테인먼트]

이머시브 공연 성공의 핵심은 청중의 적극성이다. 개츠비는 서재에 따라온 관객들에게 “돈이 아주 많이 생긴다면 뭘 하고 싶나요”하고 묻기도 했고, “데이지와 티파티를 위한 고급스러운 세팅을 해달라”며 구체적으로 부탁하기도 했다. 배우들은 관객을 ‘관객’이라 부르지 않고 ‘당신’이라 부른다. 10일 다른 관객이 보는 앞에 불려 나온 이들은 쭈뼛거리지 않고 연기를 했다.

한국 버전 ‘위대한 개츠비’의 김선화 행정 감독은 “보통 공연 중간에 갑자기 무대로 불려 나온 이들이 그 순간을 어색해하고 피하려 했던 것과는 다르다”며 “이제 젊은 관객들은 다른 관객들의 시선을 즐기며 드라마가 흘러가도록 돕는다”고 말했다. 제작사에 따르면 한국 ‘위대한 개츠비’ 관객 중 20, 30대는 각각 48%, 26%다. 기존 뮤지컬과 비슷한 추세지만, 이머시브 공연은 70% 넘는 2030 관객의 참여 의욕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고 볼 수 있다. 영국ㆍ미국의 ‘슬립 노 모어’에서는 관객에게 가면을 쓰도록 해서 적극성을 배가시켰다. 이처럼 이머시브 공연의 또 다른 특징은 관객이 다른 관객을 ‘관람’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 공연장인 ‘개츠비 맨션’은 약 400평(1322㎥)이고 한 번에 200명씩만 들어올 수 있다. ‘슬립 노 모어’의 배경은 7층짜리 공간이지만 한 번에 300명이 최다 관객이다. 기존 공연장보다 수익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머시브 공연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공연을 재관람하는 회전문 관객 비중이 높아야 한다. 제작사에 따르면 한국 ‘위대한 개츠비’ 관객의 2회 이상 관람 비율은 50%로 높은 편이다. 한 번 공연의 절반 정도가 다시 온 관객이라는 뜻이다.

이머시브 공연의 특징은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없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관객이 공연을 개인화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공연을 다 봐도 전체 줄거리는 모를 수도 있다. 배우마다 다른 이야기를 들려줬고, 모두가 공유할 서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서사를 포기한 관객들은 자신만의 경험을 가진다. 지난달 내한했던 에이미 번즈 워커 협력연출은 “공연 후 관객끼리 서로 다른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 이머시브 공연을 제대로 보는 방법”이라고 했다. 이머시브 공연이 공연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지목되고 있는 이유다. ‘위대한 개츠비’는 다음 달 28일까지 공연된다.

슬롯사이트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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